KPI(Key Performance Indicator)는 단순한 숫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을 움직이는 방향키다. 무엇을 잘했는지 칭찬하고, 무엇이 부족했다고 평가할지, 어떤 일이 먼저이고, 뒤로 밀릴지. 그 기준을 정한다.
결국 ‘KPI’는 조직의 관심과 자원을 어디로 집중할지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다. 조직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모아, 성과로 연결하는 강력한’집단적 합의 장치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KPI를 2가지 층으로 나눌 수 있다.
매출이익·불량률처럼 경영성과 그 자체를 직접 보여주는 ‘결과지표’, 그리고 잔업률 리드타임·부품납기준수율·직원만족도·공정결점 등 경영성과가 만들어지는 운영의 상태를 보여주는 ‘과정지표’가 그것이다.
결과지표는 성적표이고 과정지표는 그 성적표가 나오는체질이다. 건강한 조직은 결과지표를 보되, 과정지표로 체질을 단련한다. 문제는 결과지표가 절대 목표가 되고, 과정지표가 주변으로 밀려날 때부터 시작된다. 이때 조직(직원)은 숫자가 나오게 만드는 방식을 바꾸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조직을 망가뜨리는 건 숫자가 아니라 숫자를 맞추는 방식이다. 숫자가 좋아도 조직이 병들면 그 숫자는 ‘성과’가 아니라 ‘청구서’가 된다. 언뜻 보면 결과가 유지되지만, 내부에서는 과정의 손상과 숨은 비용이 누적된다. 겉으로는 숫자가 유지되지만 내부에서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질문은 하나다. 숫자를 바꾸기 어려운 조직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바꾸는가.
안정돼 보이나, 내부엔 균열 누적
웬만큼 관리체계가 가동되는 조직에서 KPI(결과지표)를 왜곡하기는 쉽지 않다. 매출과 이익 같은 중요한 KPI는 회사가 정한 프로세스와 회계기준을 거쳐 확정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직·간접적으로 많은 조직이 숫자를 바꾸는 대신, 숫자를 만드는 과정을 바꾸는 것을 목격했다. 무리한 생산계획으로 이번 달 목표 숫자를 맞춘다. 품질의 경고 신호를 일시적 변동이나 기술적 문제로 둔갑시킨다. 재작업과 특근을 정상 가동으로 흡수한다. 예방정비를 미루고, 임시조치를 마치 표준(Standard)인 것 처럼 굳힌다. 불량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보고의 논리만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 결과 매출 목표는 지켜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은 임시조치로 버티고 사람은 한계로 밀린다. 숫자는 안정돼 보이지만, 내부엔 균열이 누적된다. KPI는 성과를 확인하는 도구에서 성과를 만들기 위해 진실을 눌러야 하는 장치로 변한다.
더 큰 문제는 의외로 많은 조직이 이러한 과정을 성과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노력, 현장의 헌신, 위기 대응력 같은 말로 미화시킨다. 임시 조치로 버티는 것은 ‘기민함’이 되고, 과부하는 ‘열정’이 되며, 경고 신호를 눌러두는 것은 ‘관리 능력’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이것은 성숙한 조직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일류 조직은 KPI를 맞추면서 체질을 강화하지만, 2류 또는 3류 조직은 KPI를 맞추면서 체질을 깎아 먹는다. 전자는 개선과 학습으로 숫자를 만든다. 후자는 침묵과 소진으로 숫자를 만든다.
구조적 교차점에선 중간관리자
숫자가 쉽게 바뀌지 않을수록조 직은 성과를 바꾸지 못하는 대신, 숫자를 맞추는 방식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선진기업들은 반대로 간다. 글로벌 의료·생명과학 기술 기업 ‘다나허’는 DBS(Danaher Business System)라는 운영시스템으로 전사에 지속적 개선의 규율을 심어 임시방편이 아니라 표준 리드타임·품질 같은 정상운영의 실력으로 성과를 만든다고 말한다.
DBS는 조직이 매일 굴러가는 규율이다. 현장의 상태를 가시화하고, 매일의 리듬으로 편차를 드러내며, 표준을 준거로 삼아 문제를 고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성과는 월말에 억지로 맞추는 숫자가 아니라, 리드타임과 품질 같은 정상운영의 실력에서 따라오게 된다.
반대로 우리나라, 특히 국내 조립업종 현장에는 월을 상·중·하순으로 나눴을 때, 생산 부하의 50% 이상이 하순에 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계·설비·인력·부품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불균등·비평준화의 이유가 아니라 개선의 대상이다. 하순에 몰리는 상황은 현장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 시스템이 만든 ‘부하곡선’이다. 평준화하지 못하는 조직은 결국 잔업·특근·정비스킵. 검사생략 같은 방식으로 숫자를 맞추게 되고, 그런 진실은 결과지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기업의 성장사는 치열했다. 후발 공업국 이라는 설움과 한계를 인력 소진으로 메워 왔다. 그러나 이제 그 방식은 성장을 떠받치는 힘이 아니라 조직을 갉아먹는 요인이 된다. 과거의 방식으로 오늘의 성과를 유지하려는 순간, 회사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잃는다. 이제 기업을 둘러싼 일하는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이 왜곡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이 되는가? 대부분의 조직에서 KPI의 압박은 중간층을 거치며 현장의 언어로 번역된다.
중간관리자는 바로 이 구조의 교차점에 서 있다. 위에서 내려온 목표를 아래로 전달하고, 아래에서 올라온 위험 신호를 다시 위로 전달해야 하는 위치다. 결국 위에서 요구되는 성과 압박을 현장의 언어로 풀어내는 동시에, 현장에서 감지된 위험을 경영의 언어로 번역해 보고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번역’이 아니라 ‘필터’가 되는 순간, KPI는 조직을 짓누르는 또 다른 압박으로 더해 진다. 상부에는”관리중”이라는 보고로 올라가고, 현장에는 “일단 맞추자”는 주문이 내려온다. 이때부터 KPI는 성과를 관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눌러버리는 장치가 된다. 숫자는 지켜지지만 조직은 병든다.
물론 중간관리자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사이에 끼인 넛크래커(Nutcracker)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역할 구조의 함정이다. 중간층이 ‘자기 목표’를 방어하려 문제가 될 징후의 전달을 차단하거나 지연하는 순간, 조직은 조기경보 기회를 잃는다. 그 대가는 늘 크게 돌아온다. 고객 컴플레인, 대형 불량, 인력 이탈, 안전사고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형태로 청구된다.
KPI부작용 줄이는 장치의 설계법
매출과 영업이익은 기업의 생존 언어다. 다만 KPI가 진실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된다. 성과는 엄정하게 관리하되, 문제를 보고한 사람까지 압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숫자를 지키는 기술만 발달하고, 문제를 예방하는 능력은 점차 약해진다. KPI의 부작용을 줄이는 해법은 거창한 캠페인이 아니다. 결국 장치의 설계 문제다. 최소한 다음 4가지는 경영의 기본 값이 되어야 한다.
첫째, 결과지표와 과정지표를 가급적 동등한 경영지표로 다루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결과지표 매출이익·불량· 클레임)는 후행지표이다. 이미 벌어진 일의 성적표다. 그런 면에서 과정지표(잔업률 리드타임· 부품납기준수율·직원만족도·공정결점 등)는 선행지표이다.
이 관계를 분명히 이해해야 무엇을 먼저 해야하는지,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다. 경영이 결과만 놓고 추궁하면 현장은 과정을 왜곡해 숫자를 맞추게 된다. 반대로 결과와 과정을 함께 바라보면 숫자만 맞추는 방식으로 현실을 숨길 이유가 사라진다. 결과지표가 목표라면, 과정지표는 그 목표를 움직이는 ‘경영의 지렛대’라 할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과정지표는 가급적 촘촘하고 실질적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현장에서 일어나는 편차와 왜곡이 지표에 곧바로흔적으로 남아야한다. 과정표가 산출되는 로직을 좀 더 명확화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또한 회사가 시행하는 다양한혁신활동과 성과평가체계는 가능하면 과정지표의 향상으로 통합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개선이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운영의 체질로 남는다.
둘째, 보고 체계를 막힘없이 만들어야 한다. “보고를 잘하라”는 훈계가 아니라, 보고가 막히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문제점을 올린 사람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하고, 보고가 지연되는 구조적 요인(불이익, 책임 전가 등)을 제거해야 한다. 또한 현장에서 문제나 불합리를 발견하면 누구든 즉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통로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슬림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대형 조직에서 진짜 비대함은 인원수보다 상층과 하층 사이의 거리감이다. 여기서 조직이 슬림 해진다는 것은 단계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경영의 덕목은 현장의 목소리, 즉 VOE(Voice of Employee)를 직접 듣는데 있다.
넷째, KPI의 왜곡을 방지하는 최소 장치를 설계해야 한다. 단순히 보고 건수나 점검 건수 처럼 했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것은 과정지표로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라 그 활동이 결과에 실제로 어떤 기여 하느냐이다.
과정지표의 계산을 담당자가 임의로 수행하는구조 역시 반드시 끊어야 한다. 사람이 직접 계산하는 순간 방어와 편의가 개입되기 쉽다.
과정지표는 회사의 운영 인프라와 데이터에서 자동으로 산출·공유되는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 그래야 지표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의 기록으로 기능한다.
결과지표가 좋아보여도 조직의 부담이 커지는 이유는 대개 하나다. 비용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재작업 시간, 특근시간, 긴급 대응(클레임 처리), 정비 스킵, 검사 누락, 임시 조치 반복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항목들은 ‘부끄러운 실패’가 아니라 운영의 실제 비용으로 집계되어야 한다. 숨은 비용이 드러나는 순간 조직이 학습하는 계기로 바뀔수 있다.
로봇이 모든 일을 대신하지 않는 한, 성과는 결국 사람의 집중력과 판단력에 달려 있다. 그런데 많은 조직은 설비 가동률이나 수율은 정밀하게 계측하면서도, 인력의 소진은 분위기’ 정도로만 다룬다. 피로가 누적되면 확인 절차는 생략되고 작은 이상은 묻히며, 불량과 사고는 뒤늦게 결과지표로 드러난다. 소진을 숫자 밖에 두면 비용은 결국 더 큰 형태로 돌아온다.
따라서 인력 소진 역시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기적인 설문과 함께 근태, 잔업, 휴무, 이직 징후와 같은 데이터를 함께 관리하면 사람의 소진은 ‘감’이 아니라 개선의 출발점이 된다. 이와 관련해 조직의 건강 상태와 구성원의 몰입도를 진단하는 GPTW(Great Place to Work) 방식의 진단 프레임도 참고할 만하다.
이는 조직을 단순한 성과지표가 아니라 구성원의 신뢰와 몰입, 조직 문화의 건강성으로 평가하는 접근법이다[표1].
조직이 얼마나’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는지를 구성원의 인식과 경험을 통해 진단한다. 특히 구성원의 피로, 불신, 소진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비용을 조기에 파악해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데 의미가 있다.
[표1] GPTW 진단 프레임 핵심요소(아래 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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